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 역사는 아닐 것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했다. 결국 역사는 ‘미래를 보는 창’이다. 리더십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전형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거의 리더십도 ‘재해석’되면 시대를 뛰어넘는 유효한 리더십이 될 수 있다.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그 사례다. 세종의 리더십에서 오늘날 위정자가 지녀야 할 리더십의 전범을 찾을 수 있다. 세종의 리더십은 ‘미래형’이다.
세종의 리더십은 ‘소통과 헌신’으로 집약된다. 세종은 긴 안목으로 장기 비전을 갖고, 또한 좋은 인재에게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행정의 효율과 책임성을 높였다. ‘만인지상의 군주’라는 당시 역할 기대에 비춰볼 때, 세종은 ‘국가 경영’의 기본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군주였다. 훈민정음 창제, 도성 축조, 천문 관측기구 제작, 각종 의학서 편찬, 4군6진 개척, 신병기 개발 등이 가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장기 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한글 창제는 사회적으로 환영받을 수 없었다. 사대부 권력은 한자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대부 입장에서 백성은 무지해야 했다. 백성이 글을 해독하면 사대부들은 권력 기반을 잃게 된다. 중국도 우리나라의 한글 창제를 반길 리 없었다. 한글 창제는 사대부의 반대와 중국의 견제를 극복한 결과다. 세종은 장기적 안목에서 정신적·문화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세종은 신하들과의 소통을 위해 ‘관계’의 리더십을 펼쳤다. 어느 시대, 어느 위치에서나 혼자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전제군주 시대라 하더라도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으로는 ‘혼’이 살려질 수는 없다. 관계의 기저에는 ‘감화’가 있다. 세종이 잠든 신숙주에게 자신의 갓옷을 덮어주었다는 일화는 ‘관계 리더십’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세종은 ‘권한 위임’을 통해 신하에게 충분한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상을 실현했다. 세종은 32년 재위 동안 황희와 맹사성을 20년 이상 중용했다.
세종의 백성에의 헌신도 감동적이다. 세종의 즉위교서는 ‘어짐을 베푸는 정치’(施仁發政·시인발정)였다.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보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세종이 즉위한 뒤 무려 7년간 극심한 가뭄이 이어졌다. 기아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종은 경회루 옆에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장장 2년4개월 동안 먹고 자며 정무를 살폈다.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백성 사랑은 관념이 아닌 ‘실천’이었다. 백성들은 세종을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칭송했다.
그는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 중심을 잡고 원칙을 존중했다. ‘논어’의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한다”를 늘 염두에 뒀다. 그는 스스로 북극성이 되어 중심을 확고히 잡고 국가 경영에서 ‘원칙’에 충실했다. 또한 세종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연을 베풀어 신료들의 경륜과 경험을 경청했다. 백성의 목소리와 사대부의 말을 함께 들음으로써 인기 영합주의에 빠지는 것과 민심을 외면하는 잘못 모두를 극복했다.
세종의 32년 재위 기간은 태평성대였다. 장기 비전을 갖고, 관계를 통해 신하와 소통하고, 권한 위임을 통해 일할 여건을 만들어 주고, 헌신을 통해 백성의 마음을 얻고, 원칙을 존중하며, 인기 영합주의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위정자들은 되돌아봐야 한다. 장기 비전을 가졌는지, 소통과 헌신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국정 지지도를 위해 ‘원칙의 끈’을 놓지는 않았는지를.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세종의 리더십은 ‘소통과 헌신’으로 집약된다. 세종은 긴 안목으로 장기 비전을 갖고, 또한 좋은 인재에게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행정의 효율과 책임성을 높였다. ‘만인지상의 군주’라는 당시 역할 기대에 비춰볼 때, 세종은 ‘국가 경영’의 기본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군주였다. 훈민정음 창제, 도성 축조, 천문 관측기구 제작, 각종 의학서 편찬, 4군6진 개척, 신병기 개발 등이 가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장기 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한글 창제는 사회적으로 환영받을 수 없었다. 사대부 권력은 한자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대부 입장에서 백성은 무지해야 했다. 백성이 글을 해독하면 사대부들은 권력 기반을 잃게 된다. 중국도 우리나라의 한글 창제를 반길 리 없었다. 한글 창제는 사대부의 반대와 중국의 견제를 극복한 결과다. 세종은 장기적 안목에서 정신적·문화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세종은 신하들과의 소통을 위해 ‘관계’의 리더십을 펼쳤다. 어느 시대, 어느 위치에서나 혼자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전제군주 시대라 하더라도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으로는 ‘혼’이 살려질 수는 없다. 관계의 기저에는 ‘감화’가 있다. 세종이 잠든 신숙주에게 자신의 갓옷을 덮어주었다는 일화는 ‘관계 리더십’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세종은 ‘권한 위임’을 통해 신하에게 충분한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상을 실현했다. 세종은 32년 재위 동안 황희와 맹사성을 20년 이상 중용했다.
세종의 백성에의 헌신도 감동적이다. 세종의 즉위교서는 ‘어짐을 베푸는 정치’(施仁發政·시인발정)였다.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보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세종이 즉위한 뒤 무려 7년간 극심한 가뭄이 이어졌다. 기아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종은 경회루 옆에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장장 2년4개월 동안 먹고 자며 정무를 살폈다.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백성 사랑은 관념이 아닌 ‘실천’이었다. 백성들은 세종을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칭송했다.
그는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 중심을 잡고 원칙을 존중했다. ‘논어’의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한다”를 늘 염두에 뒀다. 그는 스스로 북극성이 되어 중심을 확고히 잡고 국가 경영에서 ‘원칙’에 충실했다. 또한 세종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연을 베풀어 신료들의 경륜과 경험을 경청했다. 백성의 목소리와 사대부의 말을 함께 들음으로써 인기 영합주의에 빠지는 것과 민심을 외면하는 잘못 모두를 극복했다.
세종의 32년 재위 기간은 태평성대였다. 장기 비전을 갖고, 관계를 통해 신하와 소통하고, 권한 위임을 통해 일할 여건을 만들어 주고, 헌신을 통해 백성의 마음을 얻고, 원칙을 존중하며, 인기 영합주의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위정자들은 되돌아봐야 한다. 장기 비전을 가졌는지, 소통과 헌신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국정 지지도를 위해 ‘원칙의 끈’을 놓지는 않았는지를.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기사 게재 일자 2009-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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